사상에 대한 논의는 명확한 시대구분을 전제한다. 정치사상이 시대사와 괴리되어 서술될 때 수많은 오해와 착각이 유발되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에서 영국의 근대사상을 논하는 이 글에서도 먼저 시대구분을 명확히 하고 나서 논의를 시작하고자 한다.
유럽의 정치사상사에서 ‘계몽주의시대’는 보통 1689년 영국 명예혁명으로부터 1789년 프랑스대혁명까지 100년간을 가리킨다. 그런데 유럽역사에서 ‘종교프레임’을 벗어던지는 전무후무한 정치사상적․문예적․세계관적 대변동이 관철된 이 계몽주의시대에 앞서는 약 100년간의 시기에는 계몽시대를 준비하는 피어린 ‘전사前史’가 전개되었다. 유혈이 낭자했던 17세기의 이 ‘100년 전사’에서도 이전 르네상스시대와 대조적으로 전대미문의 정치적 격변과 사상적․문예적 용트림이 일어났었다. 10-14세기는 본래적 중세시대이고, 15-16세기의 중세말기는 르네상스시대다. 르네상스 시대에 인간중심의 문예가 소생했다. 하지만 이 문예부흥은 여전히 신神개념과 기독교신앙을 고수하는 ‘기독교적 종교프레임’ 안에 갇혀 있었다. 그러나 이 ‘100년 전사’의 17세기는 비록 신관념과 기독교신앙을 버리지 않았을지라도 벌써 신개념을 이신론적理神論的으로 변형시키고 처절한 교리논쟁을 통해 기존의 가톨릭적 성서해석을 전투적으로 바꾸고 루터·칼뱅주의 개신교 교리를 한 없이 세분화시킴으로써 기존 교회체제와도 사상적으로 심각한 갈등과 마찰이 일반화된 시대였다.
예전에는 이 시대를 그냥 ‘르네상스시대’라고 불러왔고, 지금도 그렇게 부르는 이들이 남아있다. 하지만 최근 문화·사상사를 전문으로 하는 일부 사가들은 17세기의 이 ‘100년 전사’ 시대를 가리켜 ‘바로크시대(Baroque Age)’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이시대명칭이다. 바로크 건축은 르네상스의 균형․조화․대칭․논리․필연과 대립되는 기괴함․불균형․기상천외함․비논리․궤변․우연 등으로 특징지어진다. ‘Baroque’는 본래 ‘일그러진 진주’를 뜻하는데, 바로 바로크시대의 특징과 비유적으로 부합되는 면이 없지 않다. 이런 까닭에 필자도 이 문화․사상사가들의 이 새로운 시대개념을 수용해 저 ‘100년 전사’ 시대를 ‘바로크시대’라고 부르고자 한다.
그런데 구체적으로 언제부터 바로크시대가 시작되는지는 이견이 있을 수 있다. 시대사적으로만 유럽역사를 재단하는 역사가들은 루터의 종교개혁이 시작된 1517년을 바로크시대의 출발점으로 보고, 30년 전쟁을 종결하고 신․구교의 대타협을 이루어낸 베스트팔렌종교화약이 체결된 1648년을 종착점으로 보고 싶어 할 것이다. 그러나 종교개혁과 개신교의 종교·정치사상도 중세와 르네상스의 ‘기독교적 종교프레임’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하고 그대로 갇혀있었고, 종교전쟁은 국제적 차원에서 1648년에 종결되었지만, 국내에서는 가령 1689년 영국에서 개신교 귀족들이 가톨릭 군주를 몰아낸 명예혁명 시기까지도 계속되었다. 1640-1660년의 영국 청교도혁명도 순수한 정치․사회혁명으로 볼 수 없고, 루터주의와 칼뱅주의를 신봉하는 청교도종파, 즉 칼뱅주의개신교가 청교도를 탄압하던 영국국교회(성공회)의 수장 찰스 1세를 타도한, 즉 ‘이단군주’를 파문한 종교전쟁의 성격도 강하게 띠고 있었다. 그리고 1688-1689년의 명예혁명도 국교회 토리와 개신교 휘그가 연합해 네덜란드 외국군대를 불러들여 가톨릭군주 제임스 2세를 이단군주로 몰아 파문한 일종의 국제적 종교내전이었다. 또한 그 즈음 프랑스에서는 30년간의 종교내전 ‘위그노전쟁’을 종식시키고 위그노(프랑스 개신교도)에게 일정한 범위에서 종교활동을 허용한 앙리 4세의 낭트칙령(1598)이 1685년 루이14세에 의해 폐기되고 위그노에 대한 종교탄압이 재개되었다.
이와 같이 르네상스 말기가 순수한 종교전쟁 시기였다면, 바로크시대는 정치․사회혁명의 측면이 부가되었을지라도 종교전쟁도 뒤섞여 지속된 시대였다. 한마디로, ‘바로크시대’는 루터의 종교개혁(1517)으로부터 시작한 것으로 말할 수도 없지만, 베스트팔렌조약(1648)으로 끝났다고 말할 수도 없는 것이다.
다만 이쯤해서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영국에서 종교전쟁이 1689년의 영국 명예혁명에 의해 최종적으로 종식되고, 역으로 가톨릭교도와 청교도에 대한 탄압이 개시되었다는 것이다. 프랑스에서도 위그노탄압은 여전했을지라도 루이 15세(1710-1774)의 즉위와 더불어 느슨해지기 시작했다. 마녀재판도 유럽 전역과 뉴잉글랜드에서 여전히 계속되고 있었을지라도 뜸해지기 시작했다. 게다가 볼테르는 1763년 ‘보편적 관용’을 요구하는 관용론으로 잔존하는 종교탄압과 종교갈등, 잔존하는 마녀사냥에 최후의 일격을 가했다. 그러므로 종교전쟁의 종말이 개시되는 연도를 기술적으로 1688년으로 잡는 것은 가하다고 할 것이다. 그리고 바로크시대의 ‘출발점’은 루터의 종교개혁 개시시점(1517)으로 보는 견해를 물리치고 조지 뷰캐넌의 스코틀랜드의 왕권(De Jure Regni apud Scotos)이 공간된 1579년으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뷰캐넌은 이 책에서 신․구교의 공통이론인 왕권신수설王權神授說을 분쇄하고 새로이 왕권민수론王權民授論을 주창하고 기독교 교리로부터 거의 순화된 폭군방벌론을 수립함으로써 마침내 신․구교의 이단군주파문론을 뛰어넘었고, 이후 수아레즈․밀턴․그로티우스·로크 등의 인민주권론과 폭군방벌론은 뷰캐넌을 ‘표절’해서 이리저리 변형시키는 식으로 암암리에 계승했기 때문이다. 수아레즈는 가톨릭 인민에 의한 이단군주(개신교군주)방벌과 이단군주 타도를 위한 가톨릭국가의 종교침략을 정당화한 대표논객이고, 밀턴․그로티우스·로크는 청교도를 탄압하는 국교회 군주를 처형한 청교도혁명과, 종교적 관용을 확대해나가던 가톨릭군주를 추방한 명예혁명의 대표논객들이 아니던가!
이렇게 보면, ‘바로크시대’는 영국의 사상사를 기준으로 1579년부터 1688년까지 100여년 시기이고, ‘계몽주의시대’는 1689년부터 1789년까지 정확히 100년간의 시기다. 따라서 바로크시대와 계몽주의시대는 모두 200여 년의 장구한 기간을 포괄한영국과 유럽에서 이 200년간 반복되며 격화된 문화적·사상적 격변과 정치적 격돌은 모두 공자철학과 중국문화의 충격으로 인해 기존의 ‘기독교적 종교프레임’이 일그러지거나 깨져 나가고 새로운 정치철학과 문예사조가 분기奮起하면서 발생한 것이다. 이 200여 년 동안 유럽과 영국에서는 문화․예술사조가 큰 변화를 겪고 근대철학으로서의 계몽철학이 흥기해 영향력을 급속히 확장했다. 따라서 이 책에서는 바로크시대와 계몽주의시대의 영국 문화․예술가와 계몽철학자들, 즉 뷰캐넌으로부터 프란시스 베이컨, 존 밀턴, 존 웹, 리처드 컴벌랜드, 윌리엄 템플, 아이작 보시어스, 나다나엘 빈센트, 존 로크, 섀프츠베리, 존 트렝커드와 토마스 고든, 매슈 틴들, 데이비드 흄, 아담 스미스까지 15명의 영국 사상가들을 공자철학이 가한 충격과 영향의 관점에서 분석한다. 이 15명의 사상가들은 17-18세기 정치사상을 주도했을 뿐만 아니라, 휘그와 토리를 가리지 않고 바로크․계몽주의시대 영국의 현실정치를 직간접적으로 주조한 ‘공자숭배자들’이거나 ‘공자예찬자’, 또는 ‘공자표절자들’이었다.
바로크시대에도 유럽에는 선교사 ․ 상인․선장 ․ 의사 ․ 항해가 ․ 군인․여행가․모험가들이 쓴 수백 종의 중국보고서들과 서간집이 출간되었고, 또 아시아에 관한 서적들도 수백 종이 공간되었다. 이 서적들 중 약 25종은 남아시아를 취급하고, 약 15종은 동남아시아 내륙지방을 다루었고, 약 20종은 동남아제도諸島를 취급했다. 나머지 60여 종은 동아시아와 극동제국만을 집중적으로 다루었다. 따라서 바로크시대에 “이 서적들에 의해 전혀 영향받지 않은 유럽지식인들은 거의 없었을 것이고, 따라서 당대 유럽의 문물과 문화·예술·철학·과학에서 그 영향이 보이지 않는다면, 이것이 정말로 놀라운 일일 것이다.”¹ 17세기 영국에서도 중국문화의 영향은 보편화되어 있었고, 공자철학은 확산일로에 있었다.
영국은 스페인․포르투갈․네덜란드보다 뒤늦게 동방무역에 뛰어들었고, 또 17세기접 공자경전 번역서 또는 중국 관련 서적을 공간한 적이 거의 없었다. 그러나 영국인들은 16세기 중반부터 포르투갈․스페인․이탈리아․프랑스에서 출판된 중국보고서와 극동여행기, 공자경전 번역서, 또는 중국․공자연구서들을 부지런히 수입해 읽거나 영역·출판해서 대중적으로 보급했다. 포르투갈․스페인․이탈리아 정복자 ․ 모험가 ․ 약탈자․선교사들은 희망봉을 에도는 동방항로가 개척된 16세기 중반부터 극동의 유교문명과 공자철학을 유럽으로 부지런히 실어 날랐다. 그때부터 16세기말까지 이베리아와 이탈리아에서 공간된 중국관련 서적들이나 중국보고서들은 포르투갈 무명씨의 중국보고(1555), 페르남 핀토의 서간집(1556)과 핀토의 편력(1614), 갈레오티 페레이라의 중국보고(1564), 가스파르 다 크루즈의 중국풍물론(1569-1570), 마르틴 데 라다의 공식 중국보고서(1575), 베르나르디노 데 에스칼란테의 중국항해론(1577), 후앙 곤잘레스 데 멘도자의 중국제국의 역사(1585), 알레싼드로 발리냐노와 두아르테 데 산데의 로마교황청 방문 일본사절단(1590) 등이었다.² 그리고 17세기 초에는 새뮤얼 퍼채스의 퍼채스, 그의 순례여행(Purchass, His Pilgrimage)(1613)과 마테오리치․트리고의 중국인들 사이에서의 기독교 포교(De Propagatione Christiana apud Sinas)(1615)가 출판되었다.³ 그리고 세메도, 마르티니, 키르허, 나바레테, 니우호프, 마젤란 등의 각종 중국기中國記가 17세기 후반 내내 즐비하게 쏟아져 나왔다.
유럽에 공자를 최초로 소개한 서적은 발리냐노․산데 신부의 로마교황청 방문 일본사절단이었다. 공자와 공자철학에 대한 이들의 기술은 1579년 미셀 루기리 신부를 따라 최초로 광주부廣州府를 통해 중국에 정식으로 입국해 조경肇慶과 소관韶關에서 거주할 수 있는 허가를 얻는 데 성공한 마테오리치의 보고서에 기초했다. 발리냐성)의 빛(light of nature)”의 철학으로 소개하고 있다. 이후 “계몽(Enlightenment)”의 ‘빛(light)’이 된 이 ‘본성의 빛’은 세상을 밝힌답시고 오히려 어둡게 만든 ‘계시의 빛’, ‘신앙의 빛’, ‘은총의 빛’을 대체하게 된다. 퍼채스․마테오리치․세메도․마르티니․라 모트 르 베예 등의 저서들은 발리냐노와 산데가 일찍이 ‘본성의 빛’의 철학으로 소개한 공자철학을 다시 ‘본성의 빛의 철학’으로 재확인해주었다. 17-18세기의 계몽의 ‘빛’을 깊이 천착해 보면, 서양선교사들이 대학의 “명명덕明明德”, “천지명명天之明命”, “개자명야皆自明也”의 그 ‘명明’, 중용의 “자성명自誠明”, “자명성自明誠”, “성즉명의誠則明矣 명즉성의明則誠矣”, “저즉명著則明 명즉동明則動”의 그 ‘명明’, 또는 간단하게 대명제국大明帝國의 그 ‘명明’을 ‘lumière’, 또는 ‘light’(빛) 으로 이해하고 이 ‘빛’을 계몽의 ‘빛’으로 투입했거나, 독일에서는 대청제국大淸帝國의 ‘청淸’을 (Aufklärung의) ‘Klarheit’(맑음·밝음)로 이해하고 계몽주의의 그 위생적·혈통적 ‘청결’과 종교적·이념적 ‘순수화·명료화’의 무기로 투입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각종 보고서와 저서를 통해 중국을 소개한 이베리아․이탈리아인들과 영국인 퍼채스, 그리고 이어진 각종 중국기는 최초로 이 ‘본성의 빛’ 또는 ‘자연의 빛’의 철학과 함께 명대 중국제국이 자유․평등국가이자 번영하는 시장경제․복지국가이고, 동시에 종교적 자유와 관용의 국가라는 놀라운 사실을 종교갈등의 다기화多岐化으로 사분오열된 유럽에 전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중국과 공자에 관한 새로운 정보․지식의 세례 속에서 유럽의 계몽사상이 태동하기 시작했지만, 영국에서는 뷰캐넌·베이컨·밀턴·웹·템플 등이 선구先驅한 덕택에 대륙에서보다 먼저 계몽사상이 싹텄다.
프랑스․스페인 등지를 부지런히 오가면서 영국에서 누구보다도 먼저 중국의 정치문화를 접했던 조지 뷰캐넌은 1579년 공간된 스코틀랜드의 왕권에서 왕권신수설을 부정하고 왕권민수론王權民授論과 폭군방벌론을 주장하는 민본주의적 인민주권론을 설파했다. 뷰캐넌의 이 유교적․민본주의적 왕권민수론은 청교도혁명의 사상적 동력이 되었다. 이어서 프란시스 베이컨은 중국의 상고주의尙古主義 문화와 경험주의(1627)를 저술함으로써 근대적 경험론과 이상국가적 과학기술입국론立國論을 수립했다. 그리고 존 밀턴은 뷰캐넌의 자유․평등론과 폭군방벌론을 계승해 청교도혁명의 공식 이데올로그로서, 그리고 영국 크롬웰공화국의 외국어담당 서기로서 아레오파기티카(Areopagitica)(1644), 왕과 치자의 재위권(The Tenure of Kings and Magistrates)(1649), 우상파괴(Eikonoklastes)(1649) 등을 공간해 언론의 자유를 설파하고 인민주권·폭군방벌론을 논증하고 이를 바탕으로 찰스 1세 처형의 당위성을 논고했다.
17세기 중반부터는 더욱 정확하고 자세한 중국 보고서들이 쏟아져 나왔고, 공자가 처음 소개된 지 80여 년 만에 공자경전들이 번역되었다. 세메도(Alvaro de Semedo, 1585 ?~1658)의 중국제국기(스페인어판 1642, 이탈리어판 1643, 불어판 1645, 영어판 1655), 마르티니(Martino Martini; Martinus Martinius, 중국명: 衛匡國, 1614-1661)의 중국기(1659), 키르허(Athansius Kircher, 1602-1680)의 중국 해설(1667)과 니우호프의 북경사절단(1665), 나바레테의 중국왕국의 보고(1676), 마젤란의 신新중국기(1688), 르콩트의 중국의 현재상태에 대한 신新비망록(1696), 뒤알드의 중국통사(1735) 등이 출판된 것이다.⁴ 그리고 1662-1687년에는 인토르케타, 다코스타, 헤르트리히, 루지몽, 쿠플레 등에 의해 공자경전 중 논어, 대학, 중용이 라틴어로 완역되어 파리에서 출판되었다. 1711년에는 프란시스 노엘이 프라하에서 3서書와 맹자, 효경, 소학 등 6서를 라틴어로 완역해서 중국제국의 경전6서로 출판했다.⁵
중국․공자 관련 서적들이 이렇게 무수히 쏟아져 나오면서 유럽인들과 영국인들의 중국예찬과 공자숭배는 절정을 향해 치달았다. 이런 흐름 속에서 중국문화와 공자철다. 이 기간에 영국 계몽사상가들은 청교도혁명 이후 왕정복고와 명예혁명의 정치적 격변을 통과하면서 수많은 서적을 쏟아냈다. 존 웹, 리처드 컴벌랜드, 윌리엄 템플, 나다나엘 빈센트, 아이작 보시어스, 존 로크, 섀프츠베리, 트렝커드, 고든, 틴들, 흄, 아담 스미스 등이 그들이었다. 명예혁명 전후 이 ‘철학의 거장들’을 통해 영국의 계몽철학은 대륙의 계몽주의를 능가하게 된다.
한편, 18세기에 대對극동 무역을 급속히 확대한 영국은 중국상품의 최대수입국으로 떠올랐고, 중국과 극동문물을 가장 많이 수입하는 나라가 되었다. 이와 함께 영국에서 중국스타일의 예술․공예문화 풍조인 ‘시누아즈리’가 프랑스를 능가할 정도로 번창했다. 영국의 ‘시누아즈리’는 중국 문화․예술․공예 자체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중국 문화․예술․공예를 ‘모조’한 유럽판의 중국풍 문화․예술․공예 스타일을 가리킨다. ‘영국 시누아즈리’는 쉽게 말하면 중국 문화․예술․공예의 ‘영국판 리메이크’였다.
또한 영국은 동방무역의 확대와 더불어 중국문화·경제와 공자철학의 학습과 중국의 선진적 정치제도․정치사상과 윤리도덕의 수입에서도 유럽에서 가장 앞선 나라가 되었다. ‘중영中英가든(the Chinese-English garden)’ 이론의 창조와 조경造景정원 설치, 그리고 중국칠기․도자기․벽지 등을 리메이크한 품질 좋은 영국제 중국모조 제품의 대량생산은 영국의 융성한 시누아즈리와 수입대체산업의 번영에 대한 좋은 예증이다. 그리고 세습적․혈통적 젠틀맨이 중국의 ‘신사紳士’(만다린)를 모방해 ‘도덕적’젠틀맨이 된 것은 영국 윤리도덕의 선진화에 대한 좋은 예증이다. 공자철학과 중국신사에 대한 지식이 확산되는 가운데 영국 젠틀맨은 이제 ‘젠틀맨’으로 태어나서 ‘영국 신사’인 것이 아니라, 도덕적 덕성과 학식을 갖추고 국가시험으로 검증받고 공무를 수행함으로써 도덕적 품위와 실력을 입증한 ‘중국 신사’를 모방했기 때문에 ‘영국 신사’가 된 것이다. 그리하여 ‘중국 신사’를 본뜬 영국 젠틀맨은 이제 ‘혈통적·세습적’ 의미의 젠틀맨이 아니라 ‘도덕적’ 의미의 ‘영국 신사’로 ‘재탄생’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공자주의와 유교문명의 영향 아래에서 영국 사상․문화․문물은 대변동을 겪하고 공공연하게 공자를 찬양․숭배한 베이컨․밀턴․빈센트․로크․섀프츠베리․틴들․트렝커드․고든․흄·스미스 등과 같은 - 전 유럽을 뒤흔든 - 계몽주의의 거장들이 대거 등장했다. 공자철학이 확산되면서 계몽사상이 보편화되자 케임브리지 플라톤주의는 자연스럽게 영국 사상계의 변두리로 내몰렸다. 중국의 경험적 과학․기술로부터 근대 경험론을 수립한 베이컨과 이 전통을 잇는 영국 경험주의 철학자들은 경험주의적 공자철학과 중국학문을 - 대륙의 철학자들이 흔히 저지르는 ‘합리주의적 왜곡’ 없이 - 어렵지 않게 자기들의 ‘자유로운 생각(free-thinking)’ 속으로 거의 그대로 받아들인 까닭에 일약 ‘계몽운동의 중심국’이자 ‘정치 선진국’으로 급부상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18세기 영국은 계몽철학과 시누아즈리, 이 두 측면에서 대륙을 선도先導하게 된다. 대륙에서의 중영가든의 확산, 프랑스의 문화적․학술적 성취가 ‘소품’이라면 영국의 그것은 ‘걸작’이라고 칭송한 볼테르의 철학서한, 합리주의에서 경험주의로, 지성주의에서 덕성주의로의 볼테르의 철학적 ‘전향’, 케네와 미라보(Victor de Riquetti le Marquis de Mirabeau, 1715- 1789)의 로크 경험철학의 수용,⁶ 파리에서 로크와 흄의 번역서들이 대유행한 사실 등은 모두 다 계몽주의시대 영국의 문화적․철학적 헤게모니를 십분 증명해주는 것들이다.
영국의 문화와 철학은 17세기 초부터 점점 대량화․대규모화되어간 극동문물의 수입, 그리고 공자철학과 중국의 정치문화가 가하는 사상적․문화적․제도적․경제적 충격 등으로 대변동을 겪으면서 유럽을 석권하기 시작했다. 극동문화의 확산과 영국의 문화변동 속에서 영국의 사상계와 문화계는 거의 예외 없이 공자주의와 친중국 무드에 휩쓸렸다. 물론 이런 ‘휩쓸림’에 대한 영국 교단과 기독교적 유럽중심주의자들의 ‘위영국의 위정척사파는 박스터․워턴․버클리 등의 신부․신학자들과 조지 앤슨 해군제독, 소설과 에세이를 쓴 다니엘 디포 노예무역상 등이었다. 아래에서 이들의 주장을 상세하게 분석하고, 그 오류와 무지, 그리고 무고를 밝힐 것이다. 물론 공자숭배자들과 중국 찬양자들도 공자와 중국에 대해 무지와 오류가 없지 않은데, 이들의 결함들도 빠짐없이 밝혀 보일 것이다.
영국의 문화변동은 고전주의의 퇴조, 시누아즈리와 로코코예술의 대두와 석권, 중국스타일의 조원론造園論과 ‘중영가든’ 유형의 조경정원의 확산, 시누아즈리․로코코건축과 고딕건축의 결합과 유행, 중국적 미감과 유구성으로부터의 낭만주의의 발원 등이었다. 영국의 낭만주의가 유구한 과거의 역사적 경험을 중시하는 공자의 경험주의 철학과 중국의 문화예술의 영향으로부터 발생했다는 뜻밖의 사실은 극동아시아인들과 세계인들에게 유교문명의 - 그렇지 않아도 다각도로 입증되는 - 우월성을 다른 관점에서 새삼 깨닫게 해주는 역사의 한 페이지일 것이다.
영국의 정치제도는 중국 내각제, 중국식 관료제, 필기시험, 공무원임용고시의 도입, 세습귀족신분의 사회경제적 약화와 정치적 퇴출, 국민국가(평민국가)의 확립 등으로 점차 근대화되었다. 또한 공자철학의 영향 아래에서 이신론이 득세하고 탈脫기독교화되고 세속화됨에 따라 영국사회의 윤리도덕은 마찬가지로 탈脫종교화·세속화되어 본성적 윤리도덕으로 바뀌었다.
정치철학적으로는 공자철학의 영향으로 유럽 최초로 영국에서 뷰캐넌․밀턴․로크에 의해 근대적 자유․평등․혁명이념이 창출된 데 이어 섀프츠베리․허치슨․흄․아담 스미스 등 모럴리스트들의 논의 속에서 도덕철학은 공자주의적 본성도덕론으로 혁신됨으로써 일체의 ‘계시啓示도덕’의 틀과 내용을 벗어던지고 완전히 탈脫기독교화․탈주술화․세속화되었다. 또한 ‘소국=민주정, 대국=군주정’이라는 유럽의 전통적 정치도식이 흄에 의해 분쇄되고, ‘영토적 방대성’ 덕택에 ‘자유와 중도’의 정치를 동시에 향유해온 방대한 광역국가 중국을 모델로 방대한 북미주 식민지의 독립에 대비한 었다. 그리하여 독립 후 민주공화제를 채택한 미국은 유럽 전체를 합한 영토와 국력을 능가하는 ‘방대한’ 민주국가로서 유럽에서 민주주의가 위기 상황에 처할 때마다 근대 민주주의를 수호하는 ‘최후의 보루’가 될 수 있었다. ‘방대한 미국 민주주의’가 없었더라면 군국주의, 파시즘, 나치즘, 공산주의 등 각종 반민주 이데올로기와 반민주 세력들로부터 오늘날 우리가 향유하는 이 민주주의는 지켜질 수 없었을 것이다. 또한 아담 스미스는 공자의 시장철학과 중국시장경제, 그리고 중국의 영향 하에 전개된 케네의 중농주의적 자유시장론을 바탕으로 근대적 자유시장론을 완성하고, 반反곡물법운동가들과 영국의회는 곡물금수법을 폐지함으로써 자유시장제도를 완성했다.
영국은 시누아즈리, 그리고 공자철학과 중국의 정치문화의 영향 아래서 계몽철학과 정치사상, 그리고 새로운 정치․경제제도를 최고도로 발전시킴으로써 유럽 최초로 ‘높은 근대(high modernity)’를 개막했다. 아래에서 이런 점들을 문예비평가, 예술가, 계몽철학자 중심으로 정밀하게 밝혀 보이고자 한다. 공자철학의 영향 아래 활동한 영국 모럴리스트들로서 첫 번째로 들어야 할 철학자들은 존 밀턴과 나다나엘 빈센트다. 밀턴은 크롬웰의 ‘자유공화국’의 공식이데올로그로서 유교적 언론․출판자유와 종교적 관용, 중국식 학교·교육론, 인간의 자연적 자유․평등론과 폭군방벌론을 토착화․대중화시키고 본성도덕론을 대중화시켰다. 그리고 찰스 2세의 담임설교목사 빈센트는 1685년 왕명에 따라 궁정설교집 영예의 바른 개념을 공간함으로써 「대학」의 일부를 최초로 영역하고 공자의 “천하무생이귀자야天下無生而貴者也”를 “왕족 외에 아무도 나면서부터 고귀한 자는 없다(None are born great but those of Royal Family)”로 영역함으로써 로크의 태생적․자연적 평등론으로 가는 ‘영국의 길’을 개척했다. 존 로크는 밀턴, 빈센트 등을 계승해 자연적 자유․평등론과 유럽적 혁명권(저항권)이론을 완성했다.
영국의 이신론은 베이컨·뉴턴주의적 과학혁명과 더불어 다시 새로운 발전동력을국을 내세웠다. 월터 데이비스(Walter W. Davis)는 이 사상적․역사적 연관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상호 연관된 종교영역과 윤리영역에서 이신론이 인간적 노력의 모든 분야에 적용될 자연법칙에 대한 탐구를 자극한 뉴턴혁명에 의해 배양되었다는 것은 의심할 바 없다. 하지만 중국이 18세기 사상가들에게 알려진 이신론 윤리의 유일한 살아있는 원형을 제공했다는 사실 - 따라서 유토피아적 사색으로는 이제 충분치 않았다는 사실 - 을 상기하라, 그러면 중국애호가들과 주도적 이신론자들 간의 친화성은 너무 굉장해서 쉽사리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⁷ 이신론자들은 거의 다 중국애호가들이었기 때문이다.
중국애호가 피에르 벨과 절친한 관계 속에서 그에게서 배웠던 섀프츠베리는 맹자철학으로부터 시비감각론과 도덕감정론을 받아들임으로써 본성론적 도덕철학을 개창하고 이신론을 새로운 차원으로 끌어올렸고, 허치슨은 이를 더욱 발전시켰다. 흄과 아담 스미스는 섀프츠베리와 허치슨의 도덕감정론을 본질적으로 풍요롭게 만들고 다각도로 정교화했다. 모두 중국애호적․공자주의적 모럴리스트들인 섀프츠베리․허치슨․흄․스미스를 잇는 도덕철학 사조는 철저히 세속적인 ‘근대윤리학’을 향한 위대한 도정이었다. 이 도정에서 트렝커드․고든과 같은 이신론자들은 공자를 예수보다 위대한 위인으로 숭배했고, 급진적 휘그들은 영국과 유럽을 전면적으로 ‘중국화·유교화’할 것을 주창했다.
흄과 아담 스미스는 중국의 자유시장제도를 수용하고 케네의 자유시장적 중농주의를 발전시켜 근대적 자유시장론을 완성했다. 흄의 자유상공업론은 공자의 ‘무위이치無爲而治’ 테제와 비밀스럽게 연관되어 있고,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은 케네의 ‘자연질서(ordre naturel)’로 개념화된 공맹의 천지지도天地之道․무위이성無爲而成 및 사마천의 ‘자연지험自然之驗’ 개념과 ‘보이지 않게’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서구에서 천西遷이 완료된 것이다. 영국에서 자유교역은 스미스의 자유시장이론이 완성된 지 무려 70년 뒤에 허용되었다. 그럼에도 스미스의 자유시장이론은 영국을 근대화로 이끄는 근대이론들 중의 대표적 이론으로 뽑아야 할 것이다. 아래서는 광범한 사료와 자료를 근거로 이에 관해 세밀하게 정사하고 정교하게 논증할 것이다.
¹ Donald F. Lach and Edwin J. van Kley, Asia in the Making of Europe, Vol. III (Chicago: Chicago University Press, 1993), 1890쪽.
² 이들의 중국보고와 중국 관련 서적들에 대한 자세한 분석은 참조: 황태연, 공자철학과 서구 계몽 주의의 기원 (파주: 청계, 2019) , 602-714쪽.
³ 퍼채스와 마테오리치의 중국보고에 대한 상세한 분석은 참조: 황태연, 공자철학과 서구 계몽주 의의 기원, 957-975쪽 .
⁴ 이 서적들의 내용에 대한 상세한 분석은 참조: 황태연, 공자철학과 서구 계몽주의의 기원, 975-1041쪽.
⁵ 공자경전 번역사에 관련해서는 참조: 황태연, 공자철학과 서구 계몽주의의 기원, 1041-1093쪽.
⁶ Adolf Reichwein, China und Europa im Achtzehnten Jahrhundert (Berlin: Oesterheld Co. Verlag, 1922), 111쪽. 영역본: Reichwein, China and Europe - Intellectual and Artistic Contacts in the Eighteenth Century (London‧New York: Kegan Paul, Trench, Turner & Co., LTD and Alfred A. Knopf, 1925), 102쪽; Lewis A. Maverick. China - A Model for Europe, Vol.II (San Antonio in Texas: Paul Anderson Company, 1946), 119쪽.
⁷ Walter W. Davis, “China, the Confucian Ideal, and the European Age of Enlightenment” Journal of the History of Ideas Vol. 44, No. 4 (Oct.-Dec. 1983), 546쪽.